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카다 아키노부 (문단 편집) == 아마추어 시절 == [[오사카시]] 태생으로 작은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한신의 후원자로 [[무라야마 미노루]] 등 [[한신 타이거스]] 선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. 오카다가 어렸을 적에 한신의 주전 [[3루수]]이던 [[미야케 히데시]]와 캐치볼을 할 정도였고, 그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한신 타이거즈를 동경하게 되었다. 이후 오카다가 한신에 입단할 때 [[등번호]] 16번을 희망한 것도 미야케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기 때문이다. 초등학교 5학년 때 [[난카이 호크스]]의 유소년 팀 격인 '''리틀 호크스'''에 들어가면서[* 한신에는 그 당시 유소년 팀이 없어서 난카이를 택했다고 한다.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간 [[오사카 구장]]에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.] 본격적으로 야구의 길에 들어섰고, 한편으로 아버지 회사에서 결성한 동네 야구팀에서도 [[투수]]로 활약한 적도 있다.[* 당시 [[무라야마 미노루]]의 등번호이자 현재 한신의 영구결번인 '''11번'''을 달았다고 한다.] 당시 한신으로선 오카다의 아버지가 프리미엄 고객이었던 지라 집안에 [[한신 고시엔 구장]]의 특석 지정 입장권이 있었음에도 오카다는 고시엔에 갔다 하면 유독 3루 벤치 근처의 자리만 고집했는데, 이유는 라이벌인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[[3루수]] [[나가시마 시게오]]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... 이후 메이세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를 오사카 부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[[무라야마 미노루]]의 은퇴경기 때는 캐치볼 상대로 선정되기도 했다. 호쿠요 고교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 [[PL학원고등학교]]와의 지역예선 결승에서 선제 투런포를 날리는 등 맹활약하며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. 이듬해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도 2경기에 출장, 6타수 3안타의 맹타를 날렸다. 그러나 3학년 때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탈락하며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. 고교 졸업 후 [[와세다대학]]에 입학하여 주전 [[3루수]]로 뛰면서 2차례의 도쿄 6대학 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1978년엔 리그 타격 삼관왕을 달성했으며, 1979년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4번타자로 활약한 바 있다.[* 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같은 성씨의 [[오카다 타케시]]와과는 소년 야구팀과 [[와세다대학]](나이는 타케시가 1살 많으나 타케시는 재수해서 입학했다.)에서 동기였고, 각각 야구부와 축구부 주장을 맡았다.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둘 다 어렸을 적 야구소년이었다는 점인데, 오카다 타케시는 야구부의 [[똥군기]]가 싫어서 축구를 선택하게 된다. 이렇게 공통점이 많았음에도 유일한 접점이라곤 리틀 호크스 동료였다는 거 밖엔 없지만 2009년에 스포츠 잡지 Number의 와세다대 특집 기사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. [[http://sports-unkei.seesaa.net/article/399434903.html|대담 요약]]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야구 오카다 감독이 축구 오카다 감독에게 응원을 보내는 훈훈한 모습을 남기기도. 오카다 다케시는 일본인감독 최초 16강진출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 일본축구감독들 중 명장대열에 올라갔다.] 대학 시절 기록한 통산 타율 .379와 통산 81타점은 현재까지도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최다 기록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